크리톤
해설
소크라테스가 사형 선고를 받은 지 한 달이 지났다. 처형이 미뤄진 것은 신성한 배가 델로스에 가 있고, 그 배가 돌아오기 전에는 아무도 처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그 배가 수니온곶 앞바다에 보였다고 한다. 동트기 전, 아테네의 같은 구역 출신으로 소크라테스의 오랜 친구이자 재산가인 크리톤이 몰래 감옥으로 들어온다. 모든 준비가 끝나 있다. 간수들은 매수할 수 있고, 돈은 마련되었으며, 테살리아의 친구들이 그를 숨겨 줄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동의하기만 하면 된다.
크리톤은 사랑하는 친구가 찾아낼 수 있는 모든 이유를 들어 간청한다. 돈을 아끼려고 그를 죽게 내버려 둔 친구들에 대해 사람들은 뭐라고 하겠는가? 누가 그의 아들들을 키우겠는가? 도망칠 수 있는데도 자기를 적들에게 내맡기는 것은 비겁한 일이 아닌가? 소크라테스는 문제는 대중이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아니라 도망이 정의로운가 하는 것이라고 답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저 사는 것이 아니라 잘 사는 것이며, 잘 사는 것은 올바르게 사는 것과 같다. 여기서 이 대화편의 핵심에 놓인 원칙이 나온다. 사람은 결코 불의를 행해서는 안 된다. 자기가 당한 불의에 대한 앙갚음으로서조차.
이어서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법률이 자기 앞에 서서 무엇을 하려는 것이냐고 묻는 모습을 그려 본다. 플라톤의 작품에서 가장 유명한 연설 가운데 하나에서, 법률은 그에게 상기시킨다. 그에게 출생과 양육과 교육을 준 것이 자신들이라는 것, 자신들을 좋아하지 않는 시민은 누구든 전 재산을 가지고 자유롭게 떠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칠십 년 동안 아테네에 머물며 거의 한 번도 떠나지 않음으로써 그가 행동으로 그 판결을 따르기로 합의했다는 것을. 시민은 자기 나라가 잘못되었다고 설득하려 애쓸 수는 있지만, 그 법률을 힘으로 파괴할 수는 없다. 소크라테스에 대한 판결은 부당했지만, 그 부당함은 법률이 아니라 사람들에게서 나온 것이다.
『크리톤』은 정치적 의무에 관한 최초의 위대한 저작이며, 지금도 끊임없이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철학하기를 그만두라는 명령에 복종하느니 차라리 죽겠다고 소크라테스가 선언하는 『소크라테스의 변론』과 함께 읽으면, 모든 시대가 스스로 답해야 할 물음이 떠오른다. 양심은 언제 법에 저항해도 되고, 언제 법에 따라야 하는가? 한 나라의 법률 아래 살아가는 시민은 그 법률에 암묵적으로 동의한 것이라는 생각은 이천 년 뒤 사회계약 이론들 속에서 다시 나타난다. 그리고 이 대화편은 죽음의 시각에도 평생 그래 왔듯이 고요히 이성을 지키는 한 인간의 잊을 수 없는 모습을 남긴다.
이 번역은 존 버넷의 옥스퍼드판 그리스어 본문을 바탕으로 했다. 여백의 번호(43a, 43b …)는 플라톤의 모든 판본과 번역에서 쓰이는 스테파누스 쪽수로, 어느 대목이든 찾아서 인용할 수 있게 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