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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권

I

일러두기

이 작은 논문은 오래전 내 힘을 헤아려 보지도 않고 시작했다가 이미 오래전에 그만둔, 더 큰 저작에서 떼어 낸 것이다. 써 둔 부분에서 뽑아낼 수 있었던 여러 조각 가운데 이것이 가장 비중이 크고, 대중에게 내놓기에 가장 덜 부끄러워 보였다. 나머지는 이제 남아 있지 않다.

제1권

나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법을 있을 수 있는 대로 놓고 볼 때, 시민적 질서 안에 정당하고 확실한 통치 규칙이 있을 수 있는지 알아보고 싶다. 이 탐구에서 나는 늘 권리가 허락하는 것과 이익이 요구하는 것을 하나로 묶어, 정의와 효용이 서로 갈라지지 않도록 애쓸 것이다.

나는 내 주제가 중요하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고 곧바로 본론에 들어간다. 정치에 대해 글을 쓰다니 당신은 군주나 입법자냐고 사람들은 물을 것이다. 나는 아니라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정치에 대해 쓴다고 대답한다. 내가 군주나 입법자라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하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하거나, 아니면 입을 다물 것이다.

자유로운 국가의 시민으로 태어났고 주권자의 한 사람인 나는, 공적인 일에서 내 목소리가 아무리 작은 영향밖에 없다 해도, 그 일에 투표할 권리가 있다는 것만으로 그것을 잘 알아야 할 의무를 진다. 정부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내 탐구 속에서 언제나 내 나라의 정부를 사랑할 새로운 이유를 찾게 되니, 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제1장 이 제1권의 주제

사람은 자유롭게 태어났는데, 어디서나 사슬에 묶여 있다. 자기가 남들의 주인이라고 믿는 사람도 실은 그들보다 더 노예이다. 이 변화는 어떻게 일어났는가? 나는 모른다. 무엇이 그것을 정당하게 만들 수 있는가? 이 물음에는 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힘과 그 힘에서 생기는 결과만 생각한다면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어떤 인민이 복종하도록 강요받아 복종하는 동안에는 그것으로 됐다. 멍에를 떨쳐 버릴 수 있게 되어 떨쳐 버린다면 더 잘하는 것이다. 자유를 빼앗아 간 바로 그 권리로 자유를 되찾는 것이니, 인민에게 그것을 되찾을 근거가 있거나, 아니면 애초에 그것을 빼앗을 근거가 없었거나 둘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 질서는 다른 모든 권리의 바탕이 되는 신성한 권리이다. 그렇지만 이 권리는 자연에서 오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은 약정에 바탕을 두고 있다. 문제는 그 약정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다. 거기에 이르기 전에, 나는 방금 내세운 것을 먼저 확립해야 한다.

제2장 최초의 사회에 대하여

모든 사회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유일하게 자연적인 사회는 가족이다. 그런데 자식들도 자신을 보존하는 데 아버지가 필요한 동안에만 아버지에게 매여 있다. 그 필요가 사라지면 자연적 유대는 곧 풀린다. 자식들은 아버지에게 바쳐야 했던 복종에서 벗어나고,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베풀어야 했던 보살핌에서 벗어나, 모두 똑같이 독립 상태로 돌아간다. 그래도 계속 함께 묶여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자연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의지에 의한 것이며, 가족 자체도 약정에 의해서만 유지된다.

이 공통의 자유는 사람의 본성에서 나오는 결과이다. 사람의 첫째 법은 자기 보존을 돌보는 것이고, 사람의 첫째 관심은 자기 자신에게 기울여야 할 관심이다. 그리고 분별할 나이가 되면, 자신을 보존하기에 알맞은 수단을 판단할 수 있는 이는 자기뿐이므로, 그로써 그는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된다.

그러므로 가족은, 말하자면 정치 사회의 첫 본보기이다. 우두머리는 아버지의 모습이고 인민은 자식들의 모습이다. 그리고 모두가 평등하고 자유롭게 태어났으므로 오직 자기 이익을 위해서만 자기 자유를 양도한다. 차이는 다만, 가족에서는 자식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이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쏟는 보살핌을 갚아 주지만, 국가에서는 우두머리가 자기 인민에게 품지 않는 그 사랑을 명령하는 즐거움이 대신한다는 데 있다.

그로티우스는 인간의 모든 권력이 다스림을 받는 사람들을 위해 세워졌다는 것을 부정하고, 그 예로 노예제를 든다. 그가 가장 즐겨 쓰는 추론 방식은 언제나 사실로 권리를 세우는 것이다.1 더 일관된 방법을 쓸 수도 있겠지만, 폭군에게 더 유리한 방법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그로티우스에 따르면, 인류가 백 명 남짓한 사람들의 것인지, 아니면 그 백 명 남짓한 사람들이 인류의 것인지는 의심스러운 일이며, 그는 책 전체에 걸쳐 앞의 견해로 기우는 듯하다. 홉스의 생각도 그렇다. 이렇게 해서 인류는 가축 떼로 나뉘고, 각 떼에는 우두머리가 있어서, 그 우두머리는 떼를 잡아먹으려고 지킨다는 것이다.

목자가 그 가축 떼보다 우월한 본성을 지니듯, 사람의 목자인 우두머리들도 그 인민보다 우월한 본성을 지닌다. 필론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칼리굴라 황제는 이렇게 추론했고, 이 비유에서 왕들은 신이거나 인민은 짐승이라는 결론을 꽤 그럴듯하게 끌어냈다.

이 칼리굴라의 추론은 홉스와 그로티우스의 추론과 같은 데로 돌아간다. 아리스토텔레스도 그들 모두보다 앞서, 사람은 본래 평등하지 않으며 어떤 이는 노예가 되도록, 다른 이는 지배하도록 태어난다고 말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옳았지만, 결과를 원인으로 착각했다. 노예 상태에서 태어난 사람은 모두 노예가 되도록 태어난다. 이보다 확실한 것은 없다. 노예는 사슬 속에서 모든 것을 잃는다. 거기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까지 잃는다. 율리시스의 동료들이 짐승이 된 처지를 사랑했듯이 노예들은 자기의 예속을 사랑한다.2 그러므로 본성상의 노예가 있다면, 그것은 본성에 어긋나는 노예가 먼저 있었기 때문이다. 힘이 최초의 노예를 만들었고, 그들의 비겁함이 노예를 대대로 이어지게 했다.

나는 아담 왕에 대해서도, 노아 황제에 대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노아는 세 위대한 군주의 아버지였는데, 이 세 군주는 사투르누스의 자식들처럼 세상을 나누어 가졌고, 사람들은 그들에게서 사투르누스의 자식들을 알아보았다고 믿었다. 나의 이 절제를 사람들이 고맙게 여겨 주기를 바란다. 나는 이 군주들 가운데 한 사람의 직계 후손이고, 어쩌면 맏아들 계통인지도 모르니, 족보를 확인해 보면 내가 인류의 정통 왕으로 밝혀질지 누가 알겠는가? 어쨌든 아담이, 로빈슨이 자기 섬의 주권자였듯이, 세상에 유일한 주민이었던 동안에는 세상의 주권자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이 제국의 편리한 점은, 왕좌에 편안히 앉은 군주가 반란도 전쟁도 음모가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제3장 최강자의 권리에 대하여

가장 강한 자라도 자기 힘을 권리로, 복종을 의무로 바꾸지 않는 한, 언제까지나 주인일 만큼 강하지는 않다. 그래서 최강자의 권리라는 것이 나온다. 겉으로는 빈정거리는 말로 쓰이지만 실제로는 원리로 세워진 권리이다. 그런데 누가 이 말을 우리에게 설명해 주지 않겠는가? 힘은 물리적인 능력이다. 그 작용에서 어떤 도덕성이 나올 수 있는지 나는 모르겠다. 힘에 굴복하는 것은 필연에 따른 행위이지 의지에 따른 행위가 아니다. 기껏해야 조심성 있는 행위일 뿐이다.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 의무가 될 수 있겠는가?

잠시 이 이른바 권리라는 것을 가정해 보자. 거기서는 설명할 길 없는 횡설수설밖에 나오지 않는다고 나는 말한다. 힘이 권리를 만든다면 결과는 원인과 함께 바뀌기 때문이다. 처음 힘을 이기는 힘은 모두 그 권리를 물려받는다. 벌을 받지 않고 복종하지 않을 수 있게 되면 정당하게 복종하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가장 강한 자가 늘 옳으니, 자기가 가장 강한 자가 되도록 하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힘이 그치면 사라지는 권리란 대체 무슨 권리인가? 힘 때문에 복종해야 한다면 의무 때문에 복종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더는 복종을 강요받지 않으면 더는 복종할 의무도 없다. 그러니 권리라는 말은 힘에 아무것도 보태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그 말은 전혀 아무 뜻도 없다.

"권력에 복종하라." 이것이 "힘에 굴복하라"는 뜻이라면, 그 가르침은 좋지만 쓸데없다. 그것은 결코 어겨지지 않으리라고 나는 장담한다. 모든 권력은 신에게서 온다. 나도 인정한다. 그러나 모든 병도 신에게서 온다. 그렇다고 의사를 부르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는 말인가? 숲 어귀에서 강도가 나를 덮친다고 하자. 힘에 밀려 지갑을 내주어야 할 뿐 아니라, 설령 지갑을 숨길 수 있다 하더라도 나는 양심상 그것을 내줄 의무가 있는가? 결국 그가 손에 든 권총도 하나의 권력이니 말이다.

그러니 힘은 권리를 만들지 않으며, 사람은 정당한 권력에만 복종할 의무가 있다는 데 동의하자. 이렇게 해서 나의 처음 물음은 언제나 다시 돌아온다.

제4장 노예제에 대하여

어떤 사람도 자기 동류에 대해 자연적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않고, 힘은 아무런 권리도 낳지 않으므로, 사람들 사이의 모든 정당한 권위의 바탕으로 남는 것은 약정뿐이다.

그로티우스는 말한다. 한 개인이 자기 자유를 양도하여 어떤 주인의 노예가 될 수 있다면, 왜 한 인민 전체가 자기 자유를 양도하여 어떤 왕의 신민이 될 수 없겠는가? 여기에는 설명이 필요한 애매한 말이 많지만, '양도한다'는 말 하나만 붙들어 보자. 양도한다는 것은 주거나 파는 것이다. 그런데 남의 노예가 되는 사람은 자기를 주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먹고살기 위해 자기를 판다. 그러나 인민은 무엇을 위해 자기를 파는가? 왕은 신민에게 먹을 것을 대주기는커녕 오히려 자기 먹을 것을 신민에게서만 얻으며, 라블레에 따르면 왕은 조금 먹고 사는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면 신민은 자기 재산까지 빼앗긴다는 조건으로 자기 몸을 내주는 것인가? 그들에게 지킬 것이 무엇이 남는지 나는 모르겠다.

전제 군주가 신민에게 사회의 평온을 보장해 준다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고 치자. 그러나 군주의 야심이 불러오는 전쟁, 그의 끝없는 탐욕, 그 대신들의 횡포가 그들끼리의 분쟁보다 더 그들을 괴롭힌다면, 그들은 거기서 무엇을 얻는가? 그 평온 자체가 그들의 불행 가운데 하나라면 무엇을 얻는가? 지하 감옥에서도 평온하게 산다. 그렇다고 거기서 잘 지낸다고 할 수 있는가? 키클롭스의 동굴에 갇힌 그리스인들도 자기가 잡아먹힐 차례를 기다리며 거기서 평온하게 살았다.

어떤 사람이 아무 대가 없이 자기를 내준다고 말하는 것은 터무니없고 생각할 수도 없는 말을 하는 것이다. 그런 행위는, 그것을 하는 사람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부당하고 무효이다. 인민 전체에 대해 같은 말을 하는 것은 미친 사람들로 된 인민을 가정하는 것이다. 광기는 권리를 만들지 않는다.

설령 각자가 자기 자신을 양도할 수 있다 하더라도 자기 자식들을 양도할 수는 없다. 자식들은 사람으로, 자유로운 존재로 태어난다. 그들의 자유는 그들의 것이며, 그들 말고는 아무도 그것을 처분할 권리가 없다. 그들이 분별할 나이가 되기 전에는, 아버지가 그들의 이름으로 그들의 보존과 안녕을 위한 조건을 정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들을 되돌릴 수 없게, 조건 없이 내줄 수는 없다. 그런 증여는 자연의 목적에 어긋나며 부권의 한계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의적인 정부가 정당하려면, 세대마다 인민이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권한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그 정부는 더 이상 자의적이지 않을 것이다.

자기 자유를 포기하는 것은 사람으로서의 자격을, 인류의 권리를, 심지어 그 의무까지 포기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포기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보상도 있을 수 없다. 그런 포기는 사람의 본성과 양립할 수 없다. 자기 의지에서 모든 자유를 빼앗는 것은 자기 행위에서 모든 도덕성을 빼앗는 것이다. 끝으로, 한쪽에는 절대적 권위를, 다른 쪽에는 한없는 복종을 정하는 것은 공허하고 자기모순적인 약정이다. 모든 것을 요구할 권리가 있는 상대에게는 아무런 의무도 지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그리고 대가도 교환도 없는 이 단 하나의 조건이 그 행위를 무효로 만들지 않는가? 내 노예가 가진 것은 모두 내 것이고, 그의 권리는 곧 나의 권리이므로, 나의 나 자신에 대한 권리라는 것은 아무 뜻도 없는 말인데, 내 노예가 나에게 맞서 무슨 권리를 가질 수 있겠는가?

그로티우스와 다른 이들은 이른바 노예로 삼을 권리의 또 다른 기원을 전쟁에서 끌어낸다. 그들에 따르면 승자는 패자를 죽일 권리가 있으므로, 패자는 자기 자유를 값으로 치르고 자기 목숨을 되살 수 있다. 그리고 이 약정은 양쪽 모두에게 이익이 되므로 그만큼 더 정당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패자를 죽일 이 이른바 권리는 결코 전쟁 상태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하다. 원초적 독립 속에 사는 사람들은 서로 사이에 평화 상태도 전쟁 상태도 이룰 만큼 안정된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바로 그 이유만으로도 그들은 본래 서로 적이 아니다. 전쟁을 이루는 것은 사물과 사물의 관계이지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아니다. 그리고 전쟁 상태는 단순한 인적 관계에서는 생길 수 없고 오직 물적 관계에서만 생길 수 있으므로, 사적인 전쟁, 곧 사람과 사람의 전쟁은 안정된 소유가 없는 자연 상태에도, 모든 것이 법의 권위 아래 있는 사회 상태에도 존재할 수 없다.

개인끼리의 싸움, 결투, 마주쳐 벌어지는 다툼은 하나의 상태를 이루지 않는 행위들이다. 그리고 프랑스 왕 루이 9세의 칙령이 허락하고 '신의 평화'가 중지시킨 사적 전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봉건 정부의 폐단이며, 봉건제는 일찍이 없었을 만큼 터무니없는 제도로서 자연법의 원리에도, 모든 좋은 통치에도 어긋난다.

그러므로 전쟁은 결코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아니라 국가와 국가의 관계이다. 거기서 개인은 우연히 적이 될 뿐이다. 사람으로서도, 시민으로서도 아니고 병사로서이다. 조국의 구성원으로서가 아니라 조국의 수호자로서이다. 결국 어느 국가도 적으로 가질 수 있는 것은 다른 국가뿐이지 사람이 아니다. 본성이 다른 것들 사이에는 어떤 참된 관계도 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원리는 모든 시대에 확립된 준칙과 모든 문명화된 인민의 한결같은 관행에도 들어맞는다. 선전 포고는 상대 권력자들에게보다 그 신민들에게 하는 경고이다. 외국인이, 왕이든 개인이든 인민이든, 군주에게 선전 포고를 하지 않고 그 신민을 약탈하거나 죽이거나 붙잡아 두면, 그것은 적이 아니라 강도이다. 전쟁이 한창일 때에도 정의로운 군주는 적국에서 공적인 것은 모두 차지하지만, 개인의 몸과 재산은 존중한다. 자기 권리가 바탕으로 삼는 권리들을 존중하는 것이다. 전쟁의 목적은 적국을 무너뜨리는 것이므로, 적국의 수호자들이 손에 무기를 들고 있는 동안에는 그들을 죽일 권리가 있다. 그러나 그들이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면, 그들은 적도 적의 도구도 아니게 되어 다시 그저 사람이 되며, 이제 그들의 목숨에 대한 권리는 없다. 때로는 국가의 구성원을 하나도 죽이지 않고 그 국가를 죽일 수도 있다. 그런데 전쟁은 그 목적에 필요하지 않은 권리는 어떤 것도 주지 않는다. 이 원리들은 그로티우스의 원리가 아니다. 시인들의 권위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사물의 본성에서 나오며 이성에 바탕을 둔다.

정복의 권리로 말하자면, 그것은 최강자의 법 말고는 아무런 근거도 없다. 전쟁이 승자에게 패한 인민을 학살할 권리를 주지 않는다면, 승자가 갖지 않은 이 권리는 그들을 예속시킬 권리의 근거가 될 수 없다. 적을 죽일 권리는 적을 노예로 삼을 수 없을 때에만 있다. 그러므로 적을 노예로 삼을 권리는 적을 죽일 권리에서 오지 않는다. 따라서 아무 권리도 없는 적의 목숨을 그의 자유를 값으로 치르고 사게 하는 것은 부당한 거래이다. 생사여탈권을 노예로 삼을 권리 위에 세우고, 노예로 삼을 권리를 생사여탈권 위에 세운다면, 악순환에 빠진다는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모든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이 끔찍한 권리를 가정한다 해도, 전쟁에서 노예가 된 사람이나 정복된 인민은 강요받는 만큼 주인에게 복종하는 것 말고는 주인에게 아무 의무도 지지 않는다고 나는 말한다. 승자는 패자의 목숨에 해당하는 것을 받았으니 목숨을 살려 준 것이 아니다. 헛되이 죽이는 대신 쓸모 있게 죽인 것이다. 그러므로 승자는 힘과 결합된 어떤 권위도 패자에게서 얻기는커녕, 그들 사이에는 전쟁 상태가 전과 다름없이 지속되며, 그들의 관계 자체가 그 결과이다. 그리고 전쟁의 권리를 행사하는 것은 어떤 평화 조약도 전제하지 않는다. 그들은 약정을 맺었다. 그렇다고 치자. 그러나 그 약정은 전쟁 상태를 없애기는커녕 그것이 계속된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러므로 어느 쪽에서 보든 노예로 삼을 권리는 무효이다. 그것이 부당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터무니없고 아무 뜻도 없기 때문이다. 노예와 권리라는 이 두 말은 서로 모순되며 서로를 배제한다. 사람이 사람에게 하든, 사람이 인민에게 하든, 다음과 같은 말은 언제나 똑같이 어리석을 것이다. "나는 너와, 부담은 모두 네가 지고 이익은 모두 내가 갖는 약정을 맺는다. 나는 내 마음이 내키는 동안 그것을 지킬 것이고, 너는 내 마음이 내키는 동안 그것을 지킬 것이다."

제5장 언제나 최초의 약정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는 것에 대하여

지금까지 내가 반박한 것을 모두 인정해 준다 해도, 전제 정치의 지지자들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무리를 굴복시키는 것과 사회를 다스리는 것 사이에는 언제나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흩어진 사람들이 몇 명이든 차례로 한 사람에게 예속된다면, 나는 거기서 한 주인과 노예들만 볼 뿐, 한 인민과 그 우두머리는 보지 못한다. 그것은 말하자면 모임이지 결합체가 아니다. 거기에는 공공의 좋음도 정치체도 없다. 이 사람은 세상의 절반을 예속시켰다 해도 여전히 한 개인일 뿐이다. 그의 이익은 다른 사람들의 이익과 떨어져 있으므로 여전히 사적 이익일 뿐이다. 이 사람이 죽게 되면, 그 뒤에 남은 그의 제국은 흩어지고 아무 연결도 없게 된다. 떡갈나무가 불에 다 타 버린 뒤 무너져 잿더미가 되듯이.

그로티우스는 인민이 자기를 왕에게 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로티우스에 따르면 인민은 자기를 왕에게 주기 전에 이미 인민이다. 이 증여 자체가 시민적 행위이며, 공적인 심의를 전제한다. 그러므로 인민이 왕을 뽑는 행위를 검토하기 전에, 인민이 인민이 되는 행위를 검토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 행위는 반드시 다른 행위보다 앞서므로 그것이야말로 사회의 참된 토대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앞선 약정이 없다면, 선거가 만장일치가 아닌 한, 소수가 다수의 선택에 따라야 할 의무는 어디에 있겠는가? 그리고 주인을 원하는 백 명이 주인을 원하지 않는 열 명을 대신해 투표할 권리는 어디서 오겠는가? 다수결의 법 자체가 약정으로 세워진 것이며, 적어도 한 번은 만장일치를 전제한다.

제6장 사회 계약에 대하여

사람들이 이런 지점에 이르렀다고 가정해 보자. 자연 상태에서 자기 보존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이, 그 저항의 크기로 말미암아, 각 개인이 그 상태에서 자신을 유지하는 데 쓸 수 있는 힘을 넘어서는 지점이다. 그러면 이 원초적 상태는 더 이상 지속될 수 없고, 인류는 존재 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새로운 힘을 만들어 낼 수 없고 오직 있는 힘을 합치고 이끌 수 있을 뿐이므로, 자신을 보존하려면 서로 모여 저항을 이길 만한 힘의 총합을 이루고, 그것을 단 하나의 동력으로 움직여 함께 작용하게 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

이 힘의 총합은 여러 사람이 힘을 모아야만 생길 수 있다. 그러나 각자의 힘과 자유는 그가 자신을 보존하는 첫째 도구인데, 어떻게 자신을 해치지 않고 또 자신에게 기울여야 할 보살핌을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 그것을 내걸 수 있겠는가? 이 어려움을 내 주제로 다시 가져오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공동의 힘 전체로 각 구성원의 몸과 재산을 지키고 보호하며, 그것을 통해 각자가 모든 사람과 하나가 되면서도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복종하고 전과 다름없이 자유로운, 그런 결합 형태를 찾는 것." 이것이 사회 계약이 그 해답을 주는 근본 문제이다.

이 계약의 조항들은 그 행위의 본성에 의해 아주 엄밀하게 정해져 있어서, 조금만 고쳐도 헛되고 효력이 없어질 것이다. 그래서 그것들은 아마 한 번도 공식적으로 선언된 적이 없겠지만, 어디서나 똑같고 어디서나 암묵적으로 인정되고 승인된다. 그러다가 사회 계약이 깨지면, 각자는 그때 원래의 권리를 되찾고 자연적 자유를 다시 갖게 되며, 그 대가로 자연적 자유를 포기했던 약정상의 자유는 잃게 된다.

이 조항들은 제대로 이해하면 모두 하나로 귀결된다. 곧 각 구성원이 자기의 모든 권리와 함께 공동체 전체에 자신을 온전히 양도하는 것이다. 먼저, 각자가 자신을 통째로 내주므로 조건은 모두에게 똑같다. 그리고 조건이 모두에게 똑같으므로, 누구도 그것을 남들에게 부담스럽게 만드는 데 이해관계가 없다.

게다가 양도가 아무런 유보 없이 이루어지므로, 결합은 가능한 한 완전하며, 어떤 구성원도 더 요구할 것이 없다. 만일 개인들에게 어떤 권리가 남아 있다면, 개인과 공중 사이를 판가름할 공동의 상급자가 없으므로, 각자는 어떤 점에서 자기 자신의 재판관이기에 곧 모든 점에서 그러하다고 주장할 것이고, 자연 상태가 계속되어 결합은 반드시 폭정이 되거나 쓸모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끝으로 각자는 모든 사람에게 자신을 내주므로 아무에게도 자신을 내주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남에게 나에 대해 내주는 것과 똑같은 권리를 그에게서 얻지 못하는 구성원은 하나도 없으므로, 사람은 잃는 모든 것과 같은 것을 얻고, 거기에 가진 것을 지킬 더 큰 힘까지 얻는다.

그러므로 사회 계약에서 그 본질에 속하지 않는 것을 걷어 내면, 그것이 다음과 같은 말로 귀결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 각자는 자기 몸과 자기의 모든 힘을 공동의 것으로 내놓아 일반 의지의 최고 지휘 아래 둔다. 그리고 우리는 한 몸으로서 각 구성원을 전체의 나눌 수 없는 부분으로 받아들인다."

이 결합 행위는 곧바로, 각 계약 당사자의 개별 인격 대신에, 하나의 정신적이고 집합적인 단체를 만들어 낸다. 그 단체는 집회의 투표수만큼의 구성원으로 이루어지며, 바로 이 행위에서 그 통일성, 공동의 자아, 생명, 의지를 받는다. 이렇게 다른 모든 인격의 결합으로 이루어지는 이 공적 인격은 옛날에는 도시 국가라는 이름을 가졌고3, 지금은 공화국 또는 정치체라는 이름을 가진다. 그것은 수동적일 때는 그 구성원들에게 국가라고 불리고, 능동적일 때는 주권자라고 불리며, 그와 비슷한 것들과 견줄 때는 강국이라고 불린다. 구성원들로 말하자면, 그들은 집합적으로는 인민이라는 이름을 가지며, 개별적으로는 주권적 권위에 참여하는 사람으로서 시민이라고 불리고, 국가의 법에 따르는 사람으로서 신민이라고 불린다. 그러나 이 말들은 흔히 뒤섞여 서로 바꿔 쓰인다. 그것들이 아주 엄밀하게 쓰일 때 구별할 줄 알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제7장 주권자에 대하여

이 정식에서, 결합 행위는 공중과 개인들 사이의 상호 약정을 포함하며, 각 개인은 말하자면 자기 자신과 계약하므로 이중의 관계 속에서 의무를 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곧 주권자의 구성원으로서는 개인들에게, 국가의 구성원으로서는 주권자에게 의무를 진다. 그러나 여기서는 누구도 자기 자신과 맺은 약정에 매이지 않는다는 민법의 준칙을 적용할 수 없다. 자기 자신에게 의무를 지는 것과 자기가 그 일부인 전체에게 의무를 지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또 주목해야 할 것은, 공적인 심의는 각 신민이 고려되는 두 가지 다른 관계 때문에 모든 신민에게 주권자에 대한 의무를 지울 수 있지만, 반대의 이유로 주권자에게 그 자신에 대한 의무를 지울 수는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주권자가 스스로 어길 수 없는 법을 자기에게 부과하는 것은 정치체의 본성에 어긋난다. 주권자는 오직 하나의 같은 관계에서만 자신을 고찰할 수 있으므로, 그때는 자기 자신과 계약하는 개인의 경우와 같다. 이로써 인민의 단체를 구속하는 어떤 종류의 기본법도 없고 있을 수도 없으며, 사회 계약조차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단체가 이 계약에 어긋나지 않는 일에서 남에게 약정을 맺을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외국인에 대해서는 그것이 하나의 단순한 존재, 하나의 개체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치체, 곧 주권자는 그 존재를 오직 계약의 신성함에서만 끌어내므로, 남에게라 하더라도 이 최초의 행위에 어긋나는 어떤 것에도 결코 의무를 질 수 없다. 이를테면 자기 일부를 양도하거나 다른 주권자에게 복종하는 것 같은 일이다. 자기를 존재하게 하는 행위를 어기는 것은 자기를 없애는 것이며,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무것도 낳지 못한다.

이 무리가 이렇게 한 몸으로 결합되자마자, 그 구성원 하나를 해치면 그 몸을 공격하는 것이 되고, 그 몸을 해치면 구성원들이 그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의무와 이익이 똑같이 계약의 두 당사자에게 서로 돕도록 요구하며, 같은 사람들이 이 이중의 관계 아래서 그에 딸린 모든 이점을 하나로 모으려고 애써야 한다.

그런데 주권자는 그것을 이루는 개인들로만 이루어져 있으므로 그들의 이익에 어긋나는 이익을 가지고 있지 않고 가질 수도 없다. 따라서 주권적 권력은 신민에게 아무런 보증도 필요하지 않다. 그 몸이 자기의 모든 구성원을 해치려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며, 뒤에서 보겠지만 그것은 어떤 개인도 따로 해칠 수 없기 때문이다. 주권자는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언제나 그것이 마땅히 그래야 할 바 그대로이다.

그러나 신민과 주권자의 관계는 그렇지 않다. 공동의 이익이 있는데도, 주권자가 그들의 충성을 확보할 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아무것도 그들의 약정을 보증해 주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각 개인은 사람으로서, 시민으로서 가지는 일반 의지와 어긋나거나 다른 특수 의지를 가질 수 있다. 그의 특수한 이익은 공동의 이익과 전혀 다르게 그에게 말할 수 있다. 그의 절대적이고 본래 독립적인 존재는, 그가 공동의 대의에 바쳐야 할 것을 대가 없는 기부로 여기게 할 수 있다. 그것이 없어서 남들이 입는 손해가 그것을 내는 것이 그에게 주는 부담보다 덜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국가를 이루는 정신적 인격을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관념상의 존재로 여기면서, 그는 신민의 의무는 다하려 하지 않고 시민의 권리만 누리려 할 것이다. 이런 부정의가 번져 가면 정치체는 무너질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회 계약이 빈 서식이 되지 않도록, 그것은 다른 약정들에 힘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약정으로서 다음과 같은 약정을 암묵적으로 담고 있다. 곧 일반 의지에 복종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누구든 단체 전체에 의해 복종하도록 강제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름 아니라 그가 자유롭도록 강제된다는 뜻이다. 이것이야말로 각 시민을 조국에 바침으로써 그를 모든 인격적 예속에서 지켜 주는 조건이기 때문이다. 이 조건이 정치 기계의 장치와 작동을 이루며, 이것만이 시민적 약정을 정당하게 만든다. 이것이 없다면 시민적 약정은 터무니없고 폭압적이며 가장 심한 남용에 내맡겨질 것이다.

제8장 사회 상태에 대하여

자연 상태에서 사회 상태로 넘어가는 것은 사람 안에 아주 두드러진 변화를 낳는다. 그의 행실에서 본능 대신 정의를 놓고, 그의 행위에 전에는 없던 도덕성을 주는 것이다. 그때에야 비로소 의무의 목소리가 육체의 충동을 대신하고 권리가 욕구를 대신하여, 그때까지 자기만 바라보던 사람이 다른 원리에 따라 행동하고, 자기 성향에 귀 기울이기 전에 자기 이성에게 물어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상태에서 그는 자연에서 받은 여러 이점을 잃지만, 그 대신 아주 큰 이점을 얻는다. 그의 능력은 훈련되고 발달하며, 그의 생각은 넓어지고, 그의 감정은 고결해지며, 그의 영혼 전체가 아주 높이 올라가서, 만일 이 새로운 상태의 남용이 그를 흔히 그가 벗어나 온 상태보다 더 낮게 떨어뜨리지만 않는다면, 그를 영원히 그 상태에서 끌어내어 어리석고 좁은 동물에서 지성적인 존재, 한 사람을 만들어 낸 그 행복한 순간을 끊임없이 축복해야 할 것이다.

이 손익 계산 전체를 견주기 쉬운 항목으로 줄여 보자. 사람이 사회 계약으로 잃는 것은 그의 자연적 자유와, 그를 유혹하고 그가 손에 넣을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한 무제한의 권리이다. 그가 얻는 것은 시민적 자유와, 그가 가진 모든 것에 대한 소유권이다. 이 맞바꿈에서 착각하지 않으려면, 개인의 힘 말고는 한계가 없는 자연적 자유와 일반 의지에 의해 제한되는 시민적 자유를, 그리고 힘의 결과이거나 최초 점유자의 권리일 뿐인 점유와 오직 정식 권원에만 바탕을 둘 수 있는 소유권을 잘 구별해야 한다.

앞에서 말한 것에 덧붙여, 사회 상태에서 얻는 것 가운데 도덕적 자유를 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만이 사람을 참으로 자기 자신의 주인으로 만든다. 욕구에만 이끌리는 것은 노예 상태이고, 스스로 정한 법에 복종하는 것이 자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 점에 대해 이미 너무 많이 말했으며, 자유라는 말의 철학적 의미는 여기서 내 주제가 아니다.

제9장 토지 소유에 대하여

공동체가 이루어지는 순간, 그 각 구성원은 그때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자기 자신과 자기의 모든 힘 — 그가 가진 재산도 그 일부이다 — 을 공동체에 내준다. 이 행위로 점유가 주인을 바꾸면서 성질이 바뀌어 주권자의 손에서 소유권이 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도시 국가의 힘은 한 개인의 힘보다 비길 데 없이 크므로, 공적 점유는 사실상 더 강하고 더 되돌리기 어렵다. 다만 적어도 외국인에 대해서는 더 정당한 것은 아니다. 국가는 그 구성원들에 대해서는, 국가 안에서 모든 권리의 바탕이 되는 사회 계약에 의해 그들의 모든 재산의 주인이지만, 다른 나라들에 대해서는 개인들에게서 물려받은 최초 점유자의 권리에 의해서만 그 주인이기 때문이다.

최초 점유자의 권리는 최강자의 권리보다 더 실질적이지만, 소유권이 확립된 뒤에야 비로소 참된 권리가 된다. 사람은 누구나 본래 자기에게 필요한 모든 것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 그러나 그를 어떤 재산의 소유자로 만드는 정식 행위는 그를 나머지 모든 것에서 배제한다. 자기 몫이 정해지면 그는 거기에 만족해야 하며, 공동의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아무 권리도 없다. 그래서 최초 점유자의 권리는 자연 상태에서는 그토록 약한데도 사회를 이루어 사는 모든 사람에게 존중받는다. 이 권리에서 존중되는 것은 남의 것이라기보다는 자기 것이 아닌 것이다.

일반적으로 어떤 땅에 대해 최초 점유자의 권리를 인정하려면 다음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그 땅에 아직 아무도 살고 있지 않을 것. 둘째, 먹고살기에 필요한 만큼만 차지할 것. 셋째, 헛된 의식이 아니라 노동과 경작으로 그것을 점유할 것. 법적 권원이 없을 때 남들이 존중해야 할 소유의 표시는 그것뿐이다.

실제로 필요와 노동에 최초 점유자의 권리를 인정하는 것은 그 권리를 갈 수 있는 데까지 넓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권리에 한계를 두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공동의 땅에 발을 디디기만 하면 곧바로 그 주인이라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잠시 다른 사람들을 거기서 쫓아낼 힘이 있기만 하면 그들이 다시는 거기로 돌아올 권리를 빼앗을 수 있겠는가? 한 사람이나 한 인민이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고 온 인류에게서 그것을 빼앗는 일이, 벌받아 마땅한 찬탈에 의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그것은 자연이 사람들에게 함께 주는 거처와 양식을 나머지 사람들에게서 빼앗는 일이기 때문이다. 누녜스 데 발보아가 바닷가에 서서 카스티야 왕실의 이름으로 남쪽 바다와 남아메리카 전체를 차지한다고 선언했을 때, 그것만으로 그곳의 모든 주민에게서 땅을 빼앗고 세상의 모든 군주를 거기서 내쫓기에 충분했는가? 그런 식이라면 그런 의식은 헛되이 거듭되었을 것이고, 가톨릭 왕은 자기 서재에서 단번에 온 우주를 차지하기만 하면 되었을 것이다. 다만 나중에 전에 다른 군주들이 차지하고 있던 것을 자기 제국에서 떼어 내기만 하면 될 일이다.

개인들의 땅이 모이고 맞닿아 어떻게 공공의 영토가 되는지, 그리고 주권의 권리가 신민에게서 그들이 차지한 땅으로 넓혀져 어떻게 물적이면서 동시에 인적인 권리가 되는지는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점유자들을 더 큰 의존 상태에 두며, 그들의 힘 자체를 그들의 충성을 보증하는 것으로 만든다. 옛 군주들은 이 이점을 잘 느끼지 못한 듯하다. 그들은 페르시아인의 왕, 스키타이인의 왕, 마케도니아인의 왕이라고만 불렀으니, 나라의 주인이라기보다는 사람들의 우두머리로 자신을 여긴 것 같다. 오늘날의 군주들은 더 교묘하게 프랑스의 왕, 스페인의 왕, 잉글랜드의 왕 등으로 부른다. 이렇게 땅을 쥐고 있으면 그 주민도 틀림없이 쥐고 있는 것이다.

이 양도에서 기이한 점은, 공동체가 개인들의 재산을 받아들임으로써 그것을 빼앗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에게 그 정당한 점유를 보장해 주고, 찬탈을 참된 권리로, 향유를 소유권으로 바꾸어 줄 뿐이라는 것이다. 그때 점유자들은 공공재의 수탁자로 여겨지고, 그들의 권리는 국가의 모든 구성원에게 존중받으며 외국인에 맞서 국가의 모든 힘으로 지켜지므로, 공중에게 이롭고 그들 자신에게는 더욱 이로운 양도를 통해, 말하자면 자기들이 내준 모든 것을 얻은 셈이다. 이 역설은 뒤에서 보듯이 같은 땅에 대해 주권자와 소유자가 가지는 권리를 구별하면 쉽게 풀린다.

또 사람들이 아무것도 가지기 전에 결합하기 시작하고, 그다음 모두에게 충분한 땅을 차지하여 그것을 함께 누리거나, 똑같이 또는 주권자가 정한 비율에 따라 자기들끼리 나누는 일도 있을 수 있다. 이 취득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든, 각 개인이 자기 땅에 대해 가지는 권리는 언제나 공동체가 모든 땅에 대해 가지는 권리에 종속된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적 유대에 단단함이 없고 주권의 행사에 실질적인 힘이 없을 것이다.

나는 이 장과 이 권을 모든 사회 체계의 바탕이 되어야 할 한 가지 지적으로 끝맺겠다. 그것은 기본 계약이 자연적 평등을 무너뜨리기는커녕, 오히려 자연이 사람들 사이에 두었을지 모르는 신체적 불평등 대신 도덕적이고 정당한 평등을 놓는다는 것, 그리고 사람들은 힘이나 재능에서는 불평등할 수 있지만 약정에 의해, 그리고 권리상 모두 평등해진다는 것이다.4

제1권 끝.

  1. "공법에 관한 박식한 연구는 흔히 옛 폐단의 역사에 지나지 않으며, 그것을 너무 연구하려고 애쓴 것은 잘못된 고집이었다." 다르장송 후작, 『프랑스와 그 이웃 나라들의 이해관계에 관한 논고』 필사본. 그로티우스가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
  2. 플루타르코스의 짧은 논문 「짐승도 이성을 쓴다」를 보라. ↩
  3. 이 말의 참뜻은 근대인들 사이에서 거의 완전히 지워져 버렸다. 대부분의 사람은 도시를 도시 국가로, 도시 주민을 시민으로 혼동한다. 집이 도시를 만들지만 시민이 도시 국가를 만든다는 것을 그들은 모른다. 이 같은 오류가 예전에 카르타고인들에게 비싼 대가를 치르게 했다. 키베스(시민)라는 칭호가 어떤 군주의 신민에게든 주어졌다는 것을 나는 읽어 본 적이 없다. 옛날의 마케도니아인에게도, 오늘날의 영국인에게도 주어지지 않았다. 영국인은 다른 모든 민족보다 자유에 더 가까운데도 말이다. 오직 프랑스인들만이 이 시민이라는 이름을 아주 스스럼없이 쓰는데, 그것은 그들의 사전에서 볼 수 있듯이 그들이 그에 대한 참된 관념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 이름을 함부로 쓰는 것으로 대역죄를 저지르게 될 것이다. 그들에게 이 이름은 권리가 아니라 덕을 나타낸다. 보댕이 우리의 시민과 도시민에 대해 말하려 했을 때, 그는 한쪽을 다른 쪽으로 착각하는 큰 실수를 저질렀다. 달랑베르 씨는 이 점에서 틀리지 않았으며, 그의 항목 「제네바」에서 우리 도시에 있는 네 계층의 사람들(단순한 외국인까지 치면 다섯)을 잘 구별했는데, 그 가운데 둘만이 공화국을 이룬다. 내가 아는 한, 다른 어떤 프랑스 저술가도 시민이라는 말의 참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
  4. 나쁜 정부 아래에서는 이 평등이 겉보기일 뿐이고 허상일 뿐이다. 그것은 가난한 사람을 그 가난 속에, 부자를 그 찬탈 속에 붙들어 두는 데에만 쓰인다. 실제로 법은 언제나 가진 사람에게는 이롭고 아무것도 없는 사람에게는 해롭다. 이로부터 사회 상태는 모든 사람이 무언가를 가지고 아무도 지나치게 가지지 않는 한에서만 사람들에게 이롭다는 결론이 나온다. ↩